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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깨닫는 일상

[독서노트]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항암치료가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죽음을 앞둔 투병생활의 속내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나에게 닥칠지도 모를 일이라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알고싶지도 않았다.

암을 이겨내고 돌아온 방송인은 많이 있었다.
전보다 수척해진 모습과, 몇년은 더 늙어보이는 외모가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를 알 수 있었지만,
허지웅은 조금 달랐다. 암을 이겨내고 왔다기에는
너무나 멀쩡했고 투병 전과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혈액암은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암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책을 읽으면서 허지웅이라는 사람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불행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분노가 끓어 넘치던 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책을 읽으며 몇번의 코끝이 찡했던 경험을 했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지난날이 떠오르면서 

나는 깨달음을 얻고 평온을 찾아가고 있는지 바라보게 되었다.

 

책을 읽고 인상깊었던 부분을 남긴다.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 낼 수 없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 태어난 청년들은 이기는 경험을 쌓는 일이 비교적 수월하다.
스스로 형편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을 이기는 경험을 쌓아나가자. 

출발선이 다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몸을 이기는 경험을 대신 쌓는 것이다. 

이기는 경험을 쌓는다는 건 언제 힘을 주고 뺐는지, 언제 숨을 딜이쉬고 내쉬었는지

근육의 쓰임과 호흡의 감각을 기억해내는 것과 같다.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거고 지는 건지 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컨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지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오늘 밤도 똑같이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장에 맞서
분투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재물을 쌓아 올려 자식에게 고스란히 전수해내는, 혹은 
재물 그 자체를 위한 인프라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지리멸렬한 평생의 과정이 가족의 본령이 아니다.
내부의 갈등을 가족이라는 허명으로 덮어 일방적으로 무마하려 하지 않고,
해체되었다 하더라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아무런 조건없이 언제든 다시 찾아와 옆을 지켜주는 게 가족이다.
그게 반평생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삶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마땅한 의리다. 의리 말이다. 아, 한국사회에서 의리라는 단어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저평가되어 있는가.


나는 혼자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나는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고 선배도 없다.
혼자서 해내지 못하면 그냥 끝이다. 내게 두 번째 기회같은건 없다.
이후로는 별 문제 없이 잘 살았다.
어느 이름 모를 학부 선배가 고기를 산다는 소문이 돌면 반드시 찾아가 구석에 앉아
당대의 히트상품인 대패삼겹살을 미친듯이 먹고 "쟤 누구냐?" 라는 말이 들려오기 전에
자리를 떴다. 고시원 밥통에는 화수분처럼 늘 쌀밥이 솟아나기 마련이니 옆방 아저씨가 
내어놓은 짜장면 그릇에 밥을 말아 곧잘 비벼 먹었다.
아저씨도 이름 모를 선배도 잠잠하면 편의점에서 천원에 열개들이 치즈 빵을 사 먹었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떼이면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되는 노동청 임금체불 담당자 대신
지옥 끝까지 추적해 쫒아가 돈을 받아냈다.



써놓고 보니 궁상맞지만, 요는 더 이상 아무것도 창피할 게 없다는 거다.
모든 게 생존의 문제였다. 나는 혼자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몸을 만들자.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4학년 때 취업한 이후로 여태껏 혼자 힘으로 몸을 굴려 밥을 벌어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달콤하며 떳떳한 노릇인지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객관화 할 수 있는 능력을 빨리 기를 수 있었다.
피해의식이 느껴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닉슨을 떠올린다. 닉슨의 노력과 선량함을 떠올린다.
그런 훌륭한 가능성을 가졌던 사람을 완전히 망쳐버린 피해의식에 대해
마지막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경계한다.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된다.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한국만큼 청년의 치기 어림이 쉽게 공격당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만큼 청년의 시행착오가 용서받지 못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만큼 청년이라는 말이 염가로 거래되는 나라는 없다.
밥벌이를 하며 살아남아 세상을 바꿀 주체가 되려면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가면을 써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가면 안의 내가 탄탄하지 못하다면
가면을 쓰든 안 쓰든 아무 차이가 없다. 비빌 구석이 필요하다.
생각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등대 노릇을 해줄 어른을 만나
지혜를 빼먹어라. 물론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어른을 갈망했다.
하지만 그런 어른을 식별할 밝은 눈이 없었는지, 아니면 단지 운이 없었는지
평생에 인연이 없었다. 
그럴 때는 이미 죽은 어른의 글에 기대도 좋다. 나는 그렇게 했다.
여의치 않으면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최악의 어른을 찾아내 그의 인생과
나의 선택들을 비교하며 늘 경계하는 것도 훌륭한 선택지다. 
부디 청년들이 버거운 원칙이나 위악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젊은 날의 나는 대개 불행했고, 앞으로도 불행을 떨쳐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에 잠식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사람은 거만했고, 거만해서 재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수 없는 불행에 잡어먹히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골몰했다.
나는 너무 어랜 시간 동안 불행에 시달린 이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피해의식은 살마을 괴물로 만든다. 피해의식이 만든 괴물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해받을 수 있다고, 아니 이해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불행했으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의 사연이 나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그런 괴물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불행과 함께 살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야 했다.



불행이란 설국열차의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 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임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특히 젊은 날은 객관화가 어려운 시기다. 내 노력을 알아주는 조직도 어른도 드물다
정당한 대가를 바랄 수도 없다. 타인에 관한 경험이 적어서 내 불행만이 굉장히 특별하고 잔인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 든다고 상황이 개벽하지 않는다. 여전히 내 노력의 가격은 형편없고 나의 헌신에 고마움을 표하는 이도 없으며
때로는 평훼하고 뒷말을 하고 진심을 곡해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심지어 그게 내 가족일 때 사람은 크게 좌절한다. 



과거는 변수일 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인한다.
보다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한다.
희망이 없다. 운이 없다 는 식의 말로 희망과 운을 하루하루 점치지 말라. 
희망은 불행에 대한 반사작용 같은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부디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내일을 모색해 나갈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리고 행복하길.